“지금 제일 절망적인 건 젊은이들이 이 나라에 태어나서 살고 있다는 것이 보람과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비참하다고 느끼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정치인데 정치에서 희망이 안 보여요.” ‘민주화운동의 대부’라는 별명을 가진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민주화운동이 없었다. 그러나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또 내세운 일도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진실, 광장에 서다> 추천 글에서 김정남(78·이하 호칭 생략) 선생을 평가한 대목이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민주화운동의 비밀병기’, ‘막후 기획자’ 등의 별명을 가진 김정남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의 사법살인인 인혁당(2차)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김지하의 양심선언에서부터 전두환 정권 시절의 김영삼-김대중 공동성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 폭로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역사적 순간마다 막후에서 활약했다. 6월항쟁 때 그의 역할은 2년 전에 나온 영화 <1987>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인물로도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김정남은 민주화가 될 때까지 숱한 운동단체의 고문 자리 하나 맡은 적이 없었다. 가정환경 조사 때 아빠 직업을 늘 무직으로 적어야 했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 소원은 “통·반장 아빠”였다. 민주화 이후에도 그는 <평화신문> 편집국장 대리, 청와대 교문사회수석을 잠깐 지냈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글을 쓰는 데 보냈다. 최근 한인섭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과의 대담 형식으로 회고록(<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 창비)을 냈다. 지난 7일 오후 그를 만나러 서울 서초동 사무실을 찾았다. 여전히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이 팩스와 연결된 유선전화기 한 대만 놓인 작은 사무실에는 세월의 더께가 쌓인 책으로 가득했다.
김지하 구명 활동이 본격 운동의 계기 ―그동안 회고록 요청을 여러차례 거절했다면서요. “2005년에 창비에서 <진실, 광장에 서다>를 내고 난 뒤에 회고록으로 미진한 부분을 보완해달라는 권유를 몇차례 받았어요. 회고록이라는 게 보통 자기 자랑하는 거라서 상당히 조심스러워서 못하겠다고 했죠. 한인섭 교수께서 재작년에 낸 함세웅 신부님의 회고록(<이 땅에 정의를>)을 보고 함 신부가 빠트린 부분을 보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 홍성우, 함세웅 회고록 등 현대사 정리 작업을 해온 한 교수가 마지막으로 저와의 대담을 맡아주겠다고 해서 응했습니다.” ―책에 보면 “굉장히 무섭고 두려웠다”는 말이 여러 군데 있어요. 민주화운동의 비밀병기라든가 막후 주역이라는 별명이 주는 이미지는 주도면밀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강한 인물인데 실제로는 늘 두려움에 떨었다고요? “두려울 수밖에요. 1964년 처음 중앙정보부에 잡혀 갔을 때 그들이 ‘너 하나 죽이는 건 문제가 아니다. 휴전선에 데려다 놓고 네가 도망가려고 해서 쏴 죽였다고 하면 끝이다’라는 얘길 했어요. 말만의 협박이 아니라 얘들은 실제로 그럴 수 있거든요. 그동안 수백 건의 의문사 중에 몇 건은 아마 그런 식의 죽음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이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 진상조사(1974년 12월)나 2차 인혁당 사건의 구명활동을 위한 성명서 작성(1975년 2월) 등을 요청했을 때 신부님들은 ‘천주님 빽’이 있지만 저는 잡혀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늘 무서웠죠. 그래서 인혁당 사건을 조사하면서도 피해자 가족들을 직접 만나는 것은 피하고 싶었어요. 제가 관여한 것을 나중에라도 중앙정보부가 알면 살아남을 것 같지가 않았거든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늘 느끼면서도 그 길을 계속 걷게 한 힘은 무엇이었나요? “무서워도 차마 떠날 수가 없었어요. 1974년 친구 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 들어간 뒤에 지하 어머니가 일주일에 두어 차례 찾아오셨어요. 양심수의 대모였던 김한림 선생도 함께 오셔서 재판 진행 소식이나 양심수들에 대한 얘기를 전하면서 도움을 청하는데 그것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한발 한발 내딛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그 과정에서 추기경님이나 천주교 신부님 등 주변의 여러 분들이 저를 겹겹이 보호해줬어요. 그 덕분에 오늘까지 올 수 있었죠.” 김정남은 대전고 3학년 때인 1960년 3월 이승만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대전 시위(3·8 민주의거)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저항정신을 다지기 시작했다. 법대 진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3·8 의거 및 4·19를 경험한 뒤에는 “법대는 고시를 봐야 한다는 것이 좀 구차하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4·19 이후에 높아진 민주화에 대한 기대 때문에 정치학과를 선택”(<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했다. 학창 시절 서울대 문리대 신문인 <새세대>의 기자로 활동한 김정남은 6·3 시위(1964년) 주도 등 학생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6·3 시위의 배후로 지목된 학내 조직 ‘불꽃회’ 사건으로 1964년 구속돼 6개월 옥살이를 했다. 마르크스주의를 동경했던 불꽃회에 연루돼 “좌파의 맹장” 취급을 받았으나, 기본적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한 인간”(<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이었다.
2018년에 개봉된 영화 <1987>에서 배우 설경구가 민주화운동의 막후 조율사인 김정남씨를 연기하고 있다. 사진 씨제이 이앤엠
6월항쟁의 뿌리는 70년 감옥살이 ―대학 졸업(1966년) 후에는 취업 등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지 않았나요?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면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옷 위에 빨간 딱지를 붙여요. 한번 빨간 딱지가 붙으면 평생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죠. 어디 취직하기가 만만치 않고, 시험 쳐서 공직에 가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방황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던 중에 통혁당 사건(1968년) 등 여러 공안사건이 터졌어요. 그런 것들과 직접 연관이 없어도 잡혀 들어가는 판이니까 일단 튀고 보자 해서 리어카를 한 대 사서 녹번동 일대의 밭에서 배추 등 야채를 사다가 불광동 시장 등에 내다파는 장사를 하기도 했어요.” 혁명을 꿈꿨던 김정남이 의회주의와 대중운동에 눈뜬 것은 1971년 신상우(2012년 작고) 의원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는 지인의 소개로 34살의 초선 의원 신상우의 비공식 보좌역으로 대정부질문 등 의정활동을 도왔다. 똑똑한 야당 의원으로 평가받은 신상우는 전두환 세력이 집권한 뒤 관제야당인 민한당의 창당 주역으로 ‘발탁’됐다. ―직접 정치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신 의원이 민한당 실세인 사무총장 시절 11대 총선(1981년) 공천을 할 때 저랑 상의했죠. 당시 고영구(83) 변호사와 친구 홍사덕(2020년 6월 작고) 등을 추천해서 의원이 됐고요. 그런데 난 그때까지도 현실정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기에 의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나중에야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노동자들과 백 번 데모하는 것보다 국회에서 한 번 올바르게 발언하는 의정활동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걸 알았죠. 의회주의를 무시할 게 아니라 최대한 활용해야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19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해 민주화투쟁의 한 방편으로 양심선언 운동을 제창하는 등 70년대에도 그의 족적은 뚜렷하지만, 김정남이 가장 빛난 지점은 1987년 6월항쟁 때였다. 그해 1월초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물고문으로 숨진 뒤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숨졌다”고 거짓 발표를 했다가 국민적 분노에 밀려 범인을 3명으로 축소 은폐했다. 이들 3명이 잡혀간 영등포교도소에 먼저 들어와 있던 이부영(78·전 의원)이 교도관한테 범인 축소 조작된 사실을 듣고는 비밀편지(
급히 적네, 박종철 사건이 조작됐네…6월 부른 ‘감옥 편지’)를 써서 김정남에게 전했다. 이부영은 신문을 통해 터트릴 것을 제안했지만, 김정남은 가장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큰 방안을 구상했다. 김정남이 작성한 성명은 그해 5월18일 명동성당 특별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로 세상에 나왔다. 이는 6월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린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 등 6월항쟁의 불쏘시개가 됐으며, 결국 독재정권의 대국민 항복(6·29 민주화선언)으로 이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조작을 폭로할 때에는 ‘내 이름을 밝혀도 좋다’고 하셨다고요? “사건 조작이 이렇게 됐다는 내용의 편지를 추기경과 함세웅 신부한테 여러 번 보냈는데도 이것이 발표가 안 되는 거예요. 두 분 다 내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고 믿으면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꾸 발표가 늦어지길래 제보한 사람이 김정남이라고 세상에 공개해도 좋다고 했죠. 이것이 독재정권과의 마지막 승부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정권을 심판할 수 있다면 내 이름이 공개되는 게 뭐 그리 대수겠나, 마지막 싸움을 위해서라면 어떤 개인적 희생이든 감수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6월항쟁의 또다른 숨은 주역은 이른바 민주 교도관들이죠. 경찰 고위층이 고문 경관들을 면회해서 회유하는 얘기를 듣고 이부영씨에게 말해준 안유 당시 보안계장, 비밀편지를 밖으로 전한 한재동 교도관, 이를 받아서 선생님에게 전달한 전병용 전 교도관(당시 수배 중) 등이 그들인데, 전병용, 한재동씨는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어왔었죠? “1970년 서울대 사범대 독서회 사건으로 두번째 감옥에 갔을 때 전병용씨를 알았어요. 제가 겨울이었는데도 새벽에 수건으로 냉수마찰을 하는 걸 보면서 교도관들이 저 사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또 저는 사식을 일체 안 먹고 감옥 안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등 구차하게 굴지 않았어요. 그런 것에 대해 저를 달리 여겼는지 출옥한 뒤에도 연락이 되어 아주 가끔씩 같이 놀러 다니는 등 어울렸죠. 물론 그들이 관심이 많은 복지문제 해결 등에 대한 조언을 해주면서 서로 신뢰가 쌓였고요. 민청학련이나 인혁당 사건 등 이후 양심수 재판 때마다 효과적인 대응을 짤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었어요. 이들이 밖에 있는 저와 안에 있는 민주인사들과의 통신을 다 중개해줬죠.”
“잡혀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늘 무서웠죠. 그러나 김지하 어머니 등이 찾아와서 아들 재판을 도와달라는데 외면할 수가 없었죠. 그렇게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이 지난 7일 인터뷰에서 40여년의 민주화운동 역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한때 혁명 꿈꾼 뜨거운 청년
박정희 독재에 대항하면서
‘혁신보다 민주화 우선’ 선회
“두려웠지만 회피할 순 없었다” 5·18 처벌을 와이에스에게 조언 김정남은 1970년대부터 이른바 재야 민주화 세력을 단일 대오로 묶어내고 야당의 두 지도자인 김대중(DJ)과 김영삼(YS)의 연대를 끌어냈으나, 두 사람이 갈라설 때는 김영삼 편에 섰다. “임진왜란 이후에 재상을 한 사람 중에 서애 유성룡이 있고 오리 이원익이 있는데 이원익이라는 사람은 하도 착해서 그 사람 앞에서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고, 유성룡은 워낙 똑똑해서 거짓말하면 들통이 나니까 그 앞에서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그래요. 내가 볼 때 이원익 쪽에 해당하는 게 김영삼이고, 유성룡에 해당하는 게 김대중이었어요. 그래서인지 김영삼을 보면 나라도 곁에 있어줘야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또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와이에스와 디제이가 대립할 때 나는 김영삼이 후보가 되는 게 옳다고 봤어요. 박정희를 거꾸러뜨린 것은 1970년대 말 김영삼의 용기있는 행동의 결과였거든요. 3당 합당(1990년) 때는 그 길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걸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말리지는 않았어요. 그다음 대선(92년) 때도 양김 단일화가 안 되면 노태우를 잇는 독재세력이 또 될 텐데 그러면 또다시 우리가 민주화라는 고생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말이죠.” 그는 김영삼 정부의 초대 교문사회수석으로 1993년 2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청와대에서 일했다. 대통령 취임사와 금융실명제 실시 담화문 등 굵직한 발표문 작성을 도맡다시피 했으며,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을 주도했다. 재직하는 동안 보수세력한테 ‘빨갱이 수석’이라는 공격을 집요하게 받았다. ―재야에서 민주화운동 하다가 청와대에서 일해보니까 어땠어요? “사실 민주화라는 것만 되면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향해서 마구 달려왔는데 막상 국정운영에 참여해보니까 우리가 너무 무식하고, 국정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았어요.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서 밤새 울어보긴 했지만, 이 나라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멈춰서서 한 번도 고뇌해본 적이 없었잖아요. 나 자신의 무지를 새삼 느꼈고, 국정 하나하나에 경건해야 하는 거구나 깨달았죠.” ―5·18 책임자를 기소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셨다고요? “그때 민정수석실 유권해석으로는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공소시효가 아직 남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 사람들을 미워해서 처벌하자는 게 아니라 이들을 법적 심판대에 세워서 일단 진실을 밝히고, 그다음에 화해를 하자는 취지였어요. 그런데 박관용 비서실장 등 다른 참모들의 인식은 우리가 민정계와 연합해서 집권까지 왔는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치느냐는 거였어요. 와이에스도 그런 생각에서 그건 역사에 맡기자고 했고요. 그러다가 1995년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비자금 4천억원을 폭로한 것을 계기로 와이에스가 결국 5·18 특별법을 만들어 두 사람을 처벌했죠.” ―김영삼 정부가 군 하나회 청산이나 금융실명제 실시 등 오랜 적폐를 많이 청산하고 제도적인 민주화의 기틀을 세우긴 했지만, 지금 와이에스계는 흔적도 없어졌어요. 3당 합당을 계승한 정당(국민의힘)은 와이에스가 추구했던 당의 색깔이나 분위기와도 거리가 멀고요. “무능했기 때문이죠. 민주계(와이에스계)에서는 제대로 자기 생각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김덕룡 정도뿐이었어요. 김영삼이라는 대장 하나가 있어서 와이에스계였지 그 한 명이 무너지니까 계보가 사라진 거죠. 민주화까지는 호랑이 등에 타서 잘 했는데 그걸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키워내지 못하는 바람에 기득권 세력에 거꾸로 흡수되고 말았어요.”
40여년 민주화운동에 관한 회고 대담록인 <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를 최근 출간한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한겨레>와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젊은이에게 희망 주는 정치를” ―지금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냉소를 넘어 조롱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아요. 얼마 전에는 국민의힘 중앙청년위원회의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홍보물에 ‘난 커서도 운동권처럼은 안 될란다’고 적은 일도 있었죠. “그들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를 돌아보는 게 먼저여야 해요. 당당하고 떳떳한 도덕성이 우리 운동세력이 갖고 있는 최대의 무기이자 장점인데 지금 그런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혹평과 비난, 조롱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무능하면 겸손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금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나 과거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고 오히려 뻔뻔하고 위선적인 데가 있잖아요. 나는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들이 너무 빨리 타락해버린 게 아닌가, 우리의 초심과 민주화의 열정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어요. 부끄러움과 반성이 항상 필요한데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괜찮다는 식으로 도덕성과 인간됨을 스스로 부정하는 현상이 민주화 이후 30여년 동안에 오히려 확대 심화되어 온 게 아닌가 싶어요. 특히 여야 정치권에서 말이죠.” ―87년의 민주화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상당한 수준이 됐지만, 경제·사회적으로는 양극화 등 여러 문제가 생겼어요. “지금 제일 절망적인 건 젊은이들이 이 나라에 태어나서 살고 있다는 것이 보람과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비참하다고 느끼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정치인데 정치에서 희망이 안 보여요. 코로나 때문에 지금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격차와 차별은 더 심해질 겁니다. 이런 부분의 해결과 사회 통합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보여요. 어떨 때는 집권세력이 그럴 의지나 능력이 전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현 집권세력에 대해 우려하시는군요. “지금 권력의 주체가 일단은 민주화 세력이잖아요. 그게 아니면 이런 얘기를 할 필요도 없어요. 저는 정권 담당 세력부터 도덕성과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봐요. 다른 사람의 눈에 그들이 정의롭게 비치지 않는다면 독재 군사정권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당당하고 떳떳해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 그리고 비루해선 안 됩니다. 모든 개혁은 나부터 시작해야 하거든요. 자꾸 남한테 전가하지 말고, 내가 먼저 달라지고 변하는 그런 운동을 정권에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확대해 나가야죠. 그래야 국민 통합을 향한 희망이 싹틀 수 있어요.” 그는 “지금이야말로 도덕적 쇄신 운동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 나름의 절절한 호소가 어떤 이들에게는 ‘옳은 말씀’, ‘지당한 얘기’로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화를 위해 밤새 울어본 사람들, 그런 초심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민주화운동 경력을 팔지 않는 민주화 대부의 목소리가 다르게 다가오리라.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홍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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